Namhan Fortified Castle
57th Historic Relic, Joseon Dynasty, King Inj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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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BLOG 마르첼의 블로그: 가을 남한산성
여행사진은 뺄셈이다. 그것도 무지하게 어려운...
여행가서 사진을 찍을때면 항상 이것 저것 이쁘게 보이는 풍경을 모두 사진에 담느라 막상 집에 돌아와 모니터로 보게되면 지저분하게 보일때가 많다. 거기에다 그런 사진도 수백장 이상씩 찍어놓고 그중에서 이야기가 될만한 사진을 추리기 위해 걸러내는 작업은 보통 심난한게 아니다. 욕심이 많아서... 이사진도 이쁜데..이 사진도 잘나왔는데... 그러다 보면 포스팅 하기 위해 올리는 사진을 버리지 못하고 끙끙대며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다. 그래서 사진은 뺄셈이다. 그것도 어렵기만한...
그런 뺄셈을 하기 위해 또 다시 카메라를 둘러메고 남한산성을 향했다. 분당이나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자주 찾아오기 어려운 곳이지만 가을 분위기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역사가 담긴 곳이라 더욱 의미가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 남문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의 4대문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현재는 광주에서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몇 해전에는 이곳을 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었는데 남문밑으로 터널이 개통돼서 지금은 걸어서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차가 지나가면 한 대밖에 통행이 안되서 항상 기다렸다가 차가 지나 가곤 했었다. 성남으로 내려가는 매표소 입구에서 내려다 보는 성남시의 야경도 상당히 볼만 한 곳이다.
이날은 남문에서 시작해서 수어장대를 보고 서문을 거쳐 북문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시간이 된다면 남한산성 4대문을 모두 일주 할 수도 있지만 북문에서 동문을 거쳐 남문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산책코스라고 하기엔 제법 산을 오르는 코스라 힘이 들고 시간도 걸려서 작정을 하고 와야된다.
남한산성을 돌아보기전에 <칼의 노래>의 작가인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다시 들쳐보고 왔다. 남한산성이 주는 역사적 의미가 워낙 큰탓이어서 옛 선조들이 이곳에서 청나라와 싸우며 겪었던 치욕을 다시금 새겨보니 산성을 돌아보는 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곳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한 인조 14년에 임금이 이곳에 피난하여 항전하였던 곳이다. 결국 이듬해 삼전도에서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겪었던 곳 역사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산성을 쌓아논 벽돌이며 기와등이 새삼스레 보인다. 오늘은 역사적 의미에서 남한산성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천연 요새지로 백제 신라에서도 성을 쌓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만든 성인줄 알았더니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성이다.) 광해군 13년에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고 인조 2년에 대대적인 국가사업으로 증축하여 1626년에 완공하였다. 완공되고 10년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군... 일방적으로 당하긴 했겠지만...
수백년이 흐른후 지금은 이렇게 한적한 산책길이 되었다.
저멀리 동문쪽 산성이 보인다.
이미 낙엽이 거의 떨어져서 바스락 거리면서 낙엽 밟는 기분도 괜찮다.
슬픈이야기 하나...
남문을 출발해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 수어장대로 오르면서 발아래 넓게 펼쳐지는 서울시내도 내려다보고 낙엽도 밟으면서 오르고 있는데...산책로 옆에 무릎정도 높이로 쌓아올린 돌무덤앞에서 등산복 차림의 한 아저씨가 서성거리는게 눈에 들어왔다. 돌무덤앞에는 언뜻 과자며 초코렛등의 먹을거리가 접시에 담겨있어서 이런 곳에서까지 먹을걸 파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좀더 가까이 다가서니...
아저씨는 장사꾼이 아니었다.
돌무덤 위에 손바닥크기로 코팅된 앳된 단발머리의 초등학생 정도 돼보이는 여자아이의 사진이 올려있었고, 서성거리는것으로 보였던
아저씨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돌무덤에 사진을 보고 눈물을 참으려고 하늘도 올려다 보고 그리곤 산성아래도 내려다보면서 큰 슬픔을 참지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장사하기 위해 내놓은 것처럼 보였던 과자며 초코렛이 평소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그만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것일까... 하늘나라로 떠난 딸아이와 함께 마지막으로 산책한 곳이 이곳이었을까... 아니면 오늘이 기일이었나... 차마 아저씨 주변에서 서성거리지 못하고 떠나긴 했지만 자꾸 돌아보게 된다. 자식을 잃고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마음이라니... 사진속에 아이는 밝게 웃고만 있었는데... 그 모습은 차마 사진에 담지 못하고 가슴에만 담고왔다. 딸을 키우는 입장이서 더더욱 그런 모습들이 안쓰럽게 다가왔나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모습만 생각하면 자꾸 코끝이 찡해진다.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오르는 길은 두갈래로 갈라진다.
편하게 포장된 산책로를 따라 오를 수도 있고 산성을 따라 오를 수도 있다. 산성을 따라 오르는 길이 조금은 힘들지만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경치가 좋아서 수어장대를 오를땐 늘 산성을 따라 걷곤 한다.
상무대로 내려가는 길
서울 인근의 산에 오르면 이렇게 막걸리나 동동주를 파는 곳을 만날 수 있다. 근래들어 산에 오를때마다 이런 곳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막걸리 한 잔씩 마셔주곤 한다. 안주라고 해봐야 양파, 고추에 멸치가 전부지만 단돈 천원에 산에 올라와서 맛을 보는 막걸리의 맛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청계산에 오를때도 늘 한 잔씩 하곤 하는데 오래전 겨울 수리산에서 먹었던 옥수수 막걸리의 맛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서 자주 찾게 되는가 보다.
산성은 낮은 곳이 3m 높은 곳은 7m 내외로 축조되었다.
전투에 대비해서 그런지 오가는 통로도 이렇게 좁게 만들어져 있다.
1636년 12월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의 용골대가 이곳 남한산성에 도착했을때도
저런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겠지...
수어장대 전경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인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이곳 청량산에 있다. 성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으며 왼쪽에는 사당인 청량당이 있다. 뒤쪽에는 2개의 우물이 있어 장대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물을 공급하였다.
병자호란때 이곳에서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45일 간 항전하던 곳이다.
매바위
수어장대 마당에 있는 매바위는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회(李晦)가 기일내에 완공하지 못하여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을때 매 한마리가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이회를 응시하다 갑자기 없어졌는데 돌에 매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이 없다. 요즘같이 경기가 안좋아서 입주기간 못지키는 건설회사 같았으면 참수형 당할 직원 여러명이겠다.
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측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1989년에 현판을 볼 수 있도록 이곳에 새로 설치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가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야동 순재 어르신때문에 영조라면 정조만큼 친근감이 생긴다.
수어장대는 아래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양식의 이층 누각이다. 지붕은 위아래 겹처마을 둘렀으며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八角長柱礎石) 위에 올려져 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이다. 수어장대를 한참 보고 있는데 등산객몇 명이 들어오더니 "뭐야 볼 것도 없네?" 하면서 한 바퀴 둘러보지도 않고 도로 나가버린다. 이곳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줄 알았다면 조금은 달리 보였을텐데... 안내판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 가시지...
청량당
공사비 횡령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회와, 이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와 소실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이다. 정실부인은 그렇다치고 소실까지 목숨을 버렸다는 것을 보니 이회란 관리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사당안에 안치된 초상은 6.2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 만든 것이다.
수어장대를 나와 보니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있다.
마치 CG로 그린 것 같다.
연주봉으로 내려가는 길
남한산성 서문
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가팔라서 우마차가 다닐 수 없지만 송파, 거여, 마천, 광진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인조 15년(1637년) 1월30일 아침에 임금과 세자와 신료들은 이곳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 청진에 투항했다.
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은 남성대 골프장과 마천동 거여동이다.
멀리 한강과 남산이 보이고...
매탄저(埋炭底)
병자년 추위속에서 (병자호란이 발발한게 12월이었으니 추울만도 하다) 혹독한 전쟁을 치른후 유사시에 쓰기 위하여 숯을 묻어 두었던 곳이다. 산성안에는 숯을 가마니에 담아서 묻은 곳이 94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연주봉 옹성으로 가는 출입문
이 옹송은 남한산성과 연주봉을 연결하고 있는데 둘레는 274m 이다.
머리 팔당댐쪽으로 보이는 곳이 토평쯤 될 것같다.
남한산성을 둘러보면서 이채로운 건축양식과 사방이 탁트인 경관때문에 가장 경치가 좋았던 연주봉 옹성
이 곳에서 봉수와 망루의 소임을 한듯한 원형의 석축 잔해가 발견되기도 했다.
연주봉에서 보이는 곳 구리쯤 되려나...
연주봉에서 팔당댐쪽 남한산성을 보니 산능선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띈다.
수많은 나무중에 딱 한 그루만 다른 수종과 다른 색깔이어서 이채롭다.
가까이 당겨보니 이런 모습인데...
언뜻보니 산소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묘가 있다면 벌초하러 올라가기 꽤나 힘든 곳에 덩그러니 만들어져 있다.) 우연히 은행나무가 뿌리를 내린 것인지 흥미를 끈다. 사진을 찍다보면 주위 사물에 대해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고 별것아닌 풍경에 유난스레 관심이 갈때가 있다.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는 버릇은...좋은 습관이라고 믿고싶다.
로뎅이 유명한 조각가로 이름을 날릴때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고자 찾아온 사람에게 로뎅은 이렇게 물었다.
"자넨 이 집을 들어서면서 밟고 지나온 현관의 계단이 모두 몇 개인줄 아는가?"
대답못한 그 사람은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을 들이자... 뭐 이런 얘기다.
서울근교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등산로중의 한 곳인 검단산과 그 뒤로 팔당역에서 올라갈 수 있는 예봉산도 보인다.
남한산성 북문
병자호란때 갇힌 성 안에서 김류가 지휘하는 정예병 삼백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싸웠다. 조선군이 성 문을 열고 나가서 싸운 유일한 전투였지만 김류의 군사는 전멸했다.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북문까지만 돌아보고 내려왔다.
남한산성을 남문에서 시작해서 서문과 북문까지 돌아봤으니 절반쯤 돌아본 셈이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따끈한 가락국수를 시켜놓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산성안에는 지방관아와 대장간, 술도가, 포도청, 장터, 방앗간등이 갖추어져 자족한 마을을 이루던 곳이다. 명나라 말에 융통성 있는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쫓아내고 친명배금정책을 일관한 인조의 외교정책으로 결국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이후 농업중심의 경제사회가 무너져 국가 재정이 바닥나기도 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와 인조의 사대외교 정책에 대해 현재는 인조의 실책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역사는 흐른다.
the source - 마르첼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lcyyong5/8005832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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